[중세의 가을] 악성 댓글과 사이버 모욕죄

제포선생 귀중:

 저는 심장 승모판이 약해 놀란 소식을 들으면 얼굴이 금세 붉어지는 홍증을 갖고 있는 계축년 소띠 아낙입니다. 근자에 제가 사모하던 극전문 배우녀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장안이 소란스럽습니다. 이를 전자게시판에서 본 후 심장이 벌렁하고 속증이 좀체 가라앉지 않으니 한가지 여쭙고자 하옵니다. 대관절 시속의 사람들이 말하는 여배우와 악대구문(惡對句文)과 한성부 관리들이 입안했다는 사이배(思而北) 모욕죄는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흉부 통증 아낙 귀중:

합리적 인간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합리적이라고 가정합니다. 즉, 인간은 경제적 유인에 따라 움직인다고 가정하고 각자 최대의 효용을 얻기 위해 최소의 비용을 치르려 한다고 합니다. 하여 1원이라도 비싸다면 그것을 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종종 비합리적이어서 경제학적 합리적 인간관은 비판을 받습니다만 행동의 동기를 밝히는 데 있어서는 인간은 합리적이고 합목적적인 인간이라고 가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암흑으로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지배계급의 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명확한 동기와 사실관계를 밝히지 않고 이성과 담론의 공간에서 매장하려는 부로파간다(否路破干多, Propaganda)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자의 문제인 죽은 자

 죽은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일응 고인에 대한 모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죽은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죽은 자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말을 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의식활동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 의식의 자기 존재 증명이며 살아가는 방식이라 할 것입니다. 즉, 죽은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울처럼 곧 살아남은 자들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며, 아직 죽지 않은 자이며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자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으며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것의 명확한 원인과 결과를 파헤치려는 노력을 방기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선동에 휩쓸리는 감상적인 태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희랍 왕 이디포소의 일화

 고대 희랍의 왕, 이디포소(Oedipus)는 선왕의 살인범을 찾으러 수사를 개시합니다. 야심에 찬 총명하고 자기반성적인 이 희랍의 왕은 자신이 선왕의 살인범이며 더욱 놀랍게도 자신의 어머니와 근친한 호로자식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남은 생을 세상을 떠돌게 됩니다. 이 일화는 사건을 수사하는 모든 탐정이 가져야 할 자세에 관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즉, 사건의 범인을 수사하는 자는 범인을 밝혀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의지는 일종의 동기입니다. 그 의지가 지속되는 한 사건의 조사는 계속됩니다만 그것은 곧 편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불편부당한 의지가 없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의지는 일면의 사실만 보게 합니다. 수많은 단서가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디포소 왕은 신탁의 비밀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근본에서 무너뜨리는 지적 모험을 떠나고는 자신을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근대의 이성은 이처럼 자기 파멸에 이르도록 하는 치열한 정열을 의미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눈을 가리는 무오류를 과신하는 이성의 자기당착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디포소 왕의 일화는 이후에 나오는 모든 탐정류 패관잡기와 가담항설, 가전류와 소설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전제를 가슴에 품고 소인과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지요.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훈민정음



소통을 위한 훈민정음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이유는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마음 속에 담긴 뜻을 펼쳐 전하는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문치주의 문화국가의 절정을 이루던 당대 음소문자 중 가장 발전된 문자체계인 한글은 한 나라의 왕이 만들었다는 것이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세종께서는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것입니다. 그 왕께서는 한글을 통해 백성들이 서로의 뜻을 전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편리하고 과학적인 문자를 통해 수백 년 후의 백성들은 세종대왕의 뜻과 달리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악대구문과 호대구문

 악대구문이라 함은 글 깨나 쓴다 하는 서생이 쓴 글월을 전자게시판에 등재한 후에 이를 본 글 깨나 읽는다 하는 서생들이 짧게 품평하듯 단 글을 말합니다. 과연 세종의 뜻한 바대로 한글은 편리하여 각종의 인쇄된 서책의 정보화가 편리하며 전자적으로 연결된 담론 공간에서 훌륭한 전달자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담론의 공간이라 함은 적정수의 참여자가 어떠한 논제에 대하여 서로 토론하고 의견이 형성되는 힘의 공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에서 악대구문이라 함은 자의적인 구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상인과 광인의 구분

 이를테면 악대구문은 미치고 병든 광인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서양 철학자 부고(不苦, Michel Foucault)는 '광기의 역사'에서 이러한 광인들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역사를 거꾸로 읽어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권력은 그들의 의지에 따라 편리하게 어떤 대상을 허튼 소리하는 정신 나간 짓으로 몰아붙여 공적인 공간에서 은폐하고 감금하며 자신들이 구상하는 체제를 공고히 한다는 것입니다. 악대구문은 실은 백성들이 편리하게 익혀 사용하는 뜻을 전달하는 문자의 하위 체계입니다. 상층의 소통이라는 모집합에 포함된 것이 악대구문인 것입니다.
 
 악대구문을 작성하는 자, 그리하여 사이배 모욕죄를 입안한다는 도고상과 은밀한 지대추구 관계에 있는 조정 관리와 한성부 관리들의 욕망은 악대구문을 광인 취급하여 결국에는 그들의 뜻에 반하는 담론 공간의 일체의 행위에 족쇠를 채우려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대구문이라는 개념 자체가 절대적인 경계를 갖고 있지 않고 매우 흐리고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명예훼손죄라든지 하는 민법상의 조항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사안을 전자게시판에 굳이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서도 그 전체주의적 동기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악대구문이든 호대구문이든 그것은 근본적으로 소통에 있으며, 소통은 세종대왕이 욕창을 앓으시면서 만드신 동양 최고의 문화국가의 자부심인 한글의 근본 이념이었습니다. 하여 악대구문을 처벌하겠다는 것은 조상이 만든 법을 함부로 고치지 않는다는 조종성헌의 전통에도 배치되는 것이며, 조선조 오백 년의 근본 가치를 아래로부터 무너뜨리는 싸가지 없는 호로자식이나 할 일입니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또하나 말씀드릴 것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상관관계는 로마자로 Correlation 이라고 합니다. 두가지 변수가 선형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강도를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계의 강도를 말하는 것이지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느 마을에 황새가 많이 날아오는 해에는 아기가 많이 태어난다는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 백성들은 황새가 날아오면 아기가 태어난다는 결론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황새와 아기라는 변수의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인과관계는 하나의 사건(원인)이 다른사건(결과)을 일으킬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악대구문과 배우녀의 사망이라는 변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지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대구문이 배우녀를 죽게 하였다는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악대구문이 매우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하고, 그것이 치밀한 논리적 물리적 인과관계를 띠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배우녀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향해 수많은 가능한 변수들이 있으며 악대구문과 죽음과의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상황인데 유독 악대구문만 배우녀 사망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다는 것은 선동의 의심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위험이 거래되는 주식시장과 지라시(紙裸示)

 비제도권 금융대부업, 이른바 사채업이라고 하는 것과 배우녀의 관계가 아주 없지만은 않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합니다. 배우녀의 재혼한 계부가 사채업을 하고 있으며 먼저 저 세상으로 간 배우남의 차입금의 일부가 실제 배우녀의 계부에게서 유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저화시장(증권시장)의 무가지, 지라시(紙裸示)라고 하는 매체에서 등장하는데 지라시는 저화 시장 정보원들에 의한 정보들이 재구성되어 저화시장 구성원들에게 유통되는 업계 정보지라고 합니다. 주식 시장은 기업이 운용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증서를 발행하고 그 증서가 교환되는 시장입니다. 증서는 주식이라고 하며 주식보유자는 주주라고 합니다. 주주는 기업에게서 배당수익을 받습니다. 기업이 높은 수익을 얻는다면 당연히 배당수익도 높아집니다. 따라서 기업이 미래에 높은 수익을 올린다는 기대가 형성되면 주식의 가치도 높아집니다. 즉 주식시장은 기업의 미래가치를 현재로 할인하여 교환하는 시장이며 이곳은 필연적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거래하므로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업이나 투자 대상의 건전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 주식분석가는 기본적 조사를 실시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정보가 유통되게 되는 것이고 그 정보가 지라시에 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녀와 사망한 배우남의 투자에 대한 기본적 조사를 실시하면서 둘 사이의 자금흐름에 대한 정보가 수집되었고 이것을 본 저화시장 근무자가 전자게시판에 악대구문을 올렸다고 합니다.

폐쇄적인 악대구문과 공식적인 악대구문

 그렇다면 터무니없이 과장된 악대구문은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악대구문 또는 악성 소문의 존재 여부를 알게 된 것은 소인은 배우녀의 죽음 이후였습니다. 그 전에는 장시간 전자게시판을 검색했으며 전자소식지를 구독하고 있는데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악대구문과 악성 소문이 연결된 전자담론 공간에서도 매우 폐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 사실을 증폭한 것은 현실공간에 인쇄매체를 가지고 있는 삼류 운동 및 연예 언론사였습니다. 악성 소문이라고 하는 그것 자체는 실은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저화시장 정보지였고, 그것을 보고 우연히 소문을 전자게시판에 올렸으며 일부에서 폐쇄적으로 유통되었습니다. 그 소식이 배우녀에게 들렸고 배우녀는 저화시장 근무자를 경찰에 의법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둘 사이에서 전화통화가 이루어졌고 그 후에 비극적인 사망 소식이 전해집니다.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배우녀의 자살이라는 방아쇠를 당긴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정보와 편견의 작동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실은 저화시장 근무자가 전혀 사실근거가 없는 악성 소문을 게시판에 등재하였다는 가정된 편견입니다. 그 소문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전혀 증명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저화시장 근무자가 등재한 사실 또한 낭설인지 진실인지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악대구문이 배우녀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인과관계의 연결고리도 당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대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악대구문과 자살, 악대구문을 규제하겠다는 사이배 모욕죄 입안 논의는 무엇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더러운 잡류 논객의 욕망들이 매일 가상공간에 가득 쏟아지고 있습니다. 잡류 논객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것은 권력의 더러운 지배 욕망이며 그 욕망을 위해서 이성과 논증은 광인으로 취급받아 일찌감치 감금되었습니다. 사실의 진위 여부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정보는 불확실한 사실이며 그것은 확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대구문도 아니고 호대구문도 아니며 사실도 아닙니다. 그것은 판단과 분석을 기다리는 정보일 뿐입니다.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악대구문을 처벌하겠다는 것은 그 저의가 뻔히 보이는 수작일 뿐입니다.

악대구문을 처벌하자는 자들의 자가당착

 더군다나 최초 가상공간 발설자라는 저화시장 근무자에 대한 신상정보가 가상공간에 공개되었고 이른바 마녀사냥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의 분노가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악대구문을 처벌하고 악성 소문을 근절하자는 자신이 연모했던 배우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들은 무엇에 분개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분명한 자가당착이며 어린 아이와 감정상태처럼 양극단을 오가는 미숙한 정서와 같습니다. 화란(和蘭, 네덜란드)의 학자 호이징거는 '중세의 가을'에서 그 시대의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지금 제가 보고 있는 21세기 남한의 모습과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대체 인간은 진화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피비린내와 장미향이 뒤섞인 속에서 삶은 그토록 격렬하고 대조적인 양상을 보였다. 이 시대 사람들은 마치 어린 아이의 머리를 한 거인들처럼 지옥의 공포와 순진한 쾌락, 잔인무도함과 부드러움 사이를 왕래한다. 지상의 쾌락에 대한 미칠 듯한 탐닉, 그리고 증오 아니면 선량함 등 둘 중 하나이다. 언제나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것이다."

(중세의 가을, 호이징거, 34쪽, 문학과 지성사)

by Jeff | 2008/10/11 02:33 | 세상의모든거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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